1. 유래
본디 광산김씨 청주한씨 등이 기거하였다. 1700년대 중반 순흥안씨 21세 안극(屐, 자는 여명(汝命)이 후처 광산김씨와 결혼하면서 처가에 입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중반까지 80호 가까이 번성했으나 현재는 30여호 정도가 남아있고 실거주하는 순흥안씨 후손들은 17~8여호정도이고 나머지 10여호는 타지에서 전입해온 주민들이다.
구한말 흥덕현 서일면 성신리였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정읍군 입암면 왕심리로 변경됐다.
왕심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서는 연원을 알 수 없다.
일설에
1) 왕심리는 조선시대 정읍군 서일면 성신리(誠信里)였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왕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1899년 7월 12일 기해봉기 주모자 최영두의 심문조서에도 왕심리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걸 보면 그 이전에도 지명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지도에는 모두 성신리로 표기돼 있다.
왕이 언젠가는 찾는 마을이라는 설이 있으나 왕심(旺尋)이라는 한자에서 보듯 왕과는 관련이 없다. 이는 박정희 정권 시절 김종필 총리가 두번이나 마을을 찾은데서 지어낸 구전이 아닌가 한다,
2) 조선 중기까지 '왕신원'이라고 등천리 광제원, 천원역과 함께 공공숙박시설이 있었다. 호남고속도로와 지방도가 교차하는 곳에 거사막이라는 주막과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기해봉기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 호남고속도로 확장 전까지 이곳에는 지방관료들이 세운 많은 신도비와 사적비들이 있었다. 당시 공사과정에서 모두 폐기됐다.
일제시대 멧내(현 구면)의 천석꾼 집을 뜯어다 지은 동진강유역사방관리사무소가 있었다.
1899년 5월 27일(음 4월 18일) 현재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읍방향으로 50미터 부근에 주막이 있었고 이를 거슬막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전남북지역에서 모인 동학농민군의 잔여병력들이 기해봉기를 일으킨 것을 기념해 2020년 5월 27일 마을 광장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2. 사료근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 정읍현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
방장산은 반등산이라 하였다.
"천원역(川原驛)은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영지원(迎支院)은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왕신원(王信院)은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은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고 돼 있는데 왕신원, 천원역, 광제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치는
조선시대 10리가 4.7~5.7km인 점을 감안해 왕신원의 위치는 왕심리 부근(대흥리 559 묘지터)이라면 여기서 5리(2.5km) 거리인 천원역은 현 천원 서부마을(천원리 139-10일대)로 맞아떨어진다. 여기서 광제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등천리 군영마을까지 10리(5.5km)로 측정된다.
1980년 후반까지 이곳에 각종 비석과 사당이 즐비하게 있었으나 국도1호선 확포장공사과정에서 모두 소실됐다.
1990년대중반 호남고속도로 선형개량공사과정에서는 기해농민봉기 기념비가 소실됐다.
현재의 국도1호선이 일제시대 개통된 것으로 과거 서울가는 길은 왕심리에서 호남고속도로를 나란히 타고 남쪽으로 쭈욱 뻗은 농로로 현재 가리대마을을 지나 군령을 거쳐 갈재로 통하는 길이었고 군령마을은 입암산성과 연결되는 군영이 있어 장성 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검문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유력한 광제원 자리이다.
정읍시에 편입된 신정리 정촌이나 정해리가 정읍현의 위치라는 것은 백제시대의 일이고 그 이후 정읍현의 위치는 지
한편 왕신원의 터는 현재 거슬막이라 불리우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1호선이 교차하는 굴다리 부근이다. 현재는 도로개설로 흔적이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이곳에 비석들이 있었고 고속도로에 붙은 산밑(지금은 평지가 됐다)에는 주막도 있었다.
천원역은 천원 서부마을 자리에 있었다. 근방의 천원차가 1900년대 초까지 일본 오사카로 수출되는 최초의 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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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구한말 증산 강일순이 공부를 하겠다며 잠시 머물렀던 곳(현재 큰동네 절이 있던 곳)이기도 하고 둘째부인 고수부(동학접주이자 보천교 교주 차경석의 이종누이, 고판례)가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마을이다. 지금은 왕차길(산업도로)이 뚫린 마을 서쪽 붉은댕이라는 지명은 황토가 많은 지형특성에 따라 인근에 있는 마을인 구한말 '단촌리'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다라울이라는 지명도 있다.
3. 위치
방위는 정남향으로 뒤로는 비룡산, 앞으로는 동진강의 상류가 정읍천으로 이어지며 입암산과 호남의 삼신산인 방장산이 서남향을 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와 일제가 닦아놓은 국도1호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4. 마을의 지명
과거 마을 뒷산(비룡산)은 수박골, 피난골, 탑골, 버드나무골, 밤나무골 등으로 위치에 따라 달리 불리운다.
마을 뒷산 비룡산에 가는 중간을 아랫시암골이라 불리웠는데 이곳 바위틈에 샘이 있었고 당집도 있었다. 60~70년전까지 그 부근에 마을 정자가 있어서 그곳에 앉아있으면 동네가 다보였다고 한다. 마을의 원형은 웃시암골이라 부르는 곳을 중심으로 한 큰동네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새터(新基)골이 있고 동쪽으로 원래 논이었던 곳을 1970년대말~1980년대초 IBRD차관을 들여 택지개발사업시 조성한 새터(新基)가 또 있다. 새터골에서 북쪽 산골짜기는 밤나무골, 새터에서 북쪽 비룡산(해발약 200미터) 중턱에 비룡사라는 절이 있다. 비룡사와 마을 사이에는 여러개의 방죽이 있고 부근에 수양버들이 많아서 버드나무골이라 불리웠다.
5. 역사유적
단곡리 142번지에 고종이 내린 의성김씨 열녀 정려각이 있었다.
마을회관 입구에 향교에서 내린 울산김씨 열녀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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