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역사와전통

안씨 연원에 대한 기록들

너울터울 2009. 5. 23. 11:17

 

안씨연원논란.hwp

출처 : 본글은 "죽산안씨의 중국귀화설과 안씨일가설"에 대한 허구를 파헤친 엠파이어킹님의 다음 블로그의 자료이며 첨부파일은 본 블로거가 관련 내용을 토대로 직접 작성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료 1] 농서이씨동래설(隴西李氏東來說) 관련 기록 모음



우리나라 안씨들이 신라말 당(唐)나라에서 온 농서이씨(隴西李氏) 이원(李瑗)의 아들 3형제에 기원한다는 설은 1700년대 후반부터 나돌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믿을만한 이전의 근거문헌이 없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다른 성씨들의 도시조(都始祖) 동래설(東來說)을 모방하여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설은 특정 안씨 문중에 전해오던 전통적인 시조설이 아니며, 이 설이 나돌기 시작한지 200여년이 지난 근래까지도 어느 안씨 문중도 이를 자신들의 시조설로 공인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만 보아도 이 설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76년도 죽산안씨 대동보에서 이전까지 계보가 연결되지 않던 자신들 두 문중의 시조들인 소감공(小監公, 諱 濬)과 복야공(僕射公, 諱 令儀)의 선대를 농서이씨 이원과 아들 방준(邦俊)으로 연결하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계보를 실으면서 처음으로 이를 자신들의 공식적인 시조설로 채택하였다. 여기에는 광주, 순흥 등 다른 안씨 문중까지 자신들 시조의 동생 후손이라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어 안씨 문중들 간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농서이씨 동래설 관련된 옛 기록들을 모아서 번역과 함께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광주안씨 경술보(庚戌譜,1790) 순암공(順菴公) 변무(辨誣)

    [순암공(順菴公)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

    지금 세상에 전하기를 안씨 3파가 중국에서 온 이씨 성에 유래한다고 한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에 지춘, 엽춘, 화춘이라는 형제 3인이 왜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평안케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賜姓) 받고, 방준, 방걸, 방협이라 개명하여 죽산과 광주가 분봉하였다. 광주는 10여 세를 지나 다시 순흥과 나누어지니 지금 간행하는 족보 별록의 국신(國信) 이하 12대가 그것이다.
    이는 심히 맹랑하고 근거가 없다. 또 그 관직명이 여지(麗誌, 고려사 등을 말함)와 연대가 맞지아니하며, 합치하지 않아 그것이 위서(僞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사간공(思簡公, 安省, 1344-1421)의 족보 서문 첫머리에 중국 안씨의 유래 본말과 동방 안씨의 관향이 다른 자 운운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어떻게 이씨가 사성 받았을 리가 있겠는가? 저번에(向來) 압해 정씨(押海丁氏)와 의령 남씨(宜寧南氏)가 모두 위보(僞譜)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그런 류이다. 후인들에게 전해져 믿게될까 두려운고로 이 조항을 뽑아(拔此條) 변무(辨誣, 거짓을 밝히는 글)를 지어 바로 잡는다.

    今世傳 安氏三派 謂自中國來姓李 當新羅景文王時 有兄弟三人曰 枝春 葉春 花春 平倭亂有安國之功 故賜姓安氏 三人改名 邦俊 邦傑 邦俠 分封竹山廣州 廣州傳十餘世 又分順興 今刊譜首板別錄 國信以下十二代卽是也 此甚 孟浪無據 且其官名與麗誌年代不合 其僞書無疑矣 且思簡公序文 有首記中國安氏之所由本末 記東方安氏之異其貫者云 則豈有姓李賜姓之理乎 向來 押海丁氏 宜寧南氏 皆爲僞譜 此亦類是 恐有後人傳以爲信 故拔此條 作辨誣以正之.

    조선 후기에 동성(同姓)으로 다른 본관이 여럿 있는 성씨들 중에 중국서 온 공통의 시조(都始祖)를 내세우는 성씨들이 다수 나타났다. 정씨(丁氏)와 남씨(南氏)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순암공은 안씨의 농서이씨 기원설이 이와 같은 것을 흉내낸 조작된 설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농서이씨설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 당대 최고 권위의 역사학자가 근거없는 허무맹랑한 낭설이니 후대의 사람들이 믿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도 후손들이 이 설을 믿을 것인가?
    농서이씨설(隴西李氏說) 자체가 1700년대 말에 지어낸 것이므로 거기 나오는 인물들 중 그 이전부터 광주안씨 시조로 해 오던 방걸(邦傑)을 제외한 이원(李瑗), 방준(邦俊), 방협(邦俠) 등은 가공인물임이 분명하다. 광주안씨 시조의 휘를 모방하여 형제처럼 보이도록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2. 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 문중 을축보(乙丑譜,1805년) 서문
    안성흠(安聖欽, 1760~1817) 찬, 안국승 번역, 죽산안씨대종회보 제10호(2004년 5월) 수록

    나라 안의 사대부 가문에 족보가 없는 집안은 없는데 족보라는 것은 정부자(程夫子)가 이른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밝혀 세족이 의의를 거두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죽산안씨는 한나라의 사대부로서 마땅히 족보가 있어야 할터인데 내가 비록 좁은 집안에 살았으나 이를 본적이 없다, 일찍이 종인(宗人)인 참판공 鎭씨댁에 족보가 있으나 그것이 언제 이뤄졌는지 알 수 없고 우리 시조 상서 좌복야 상장군 휘 영의공(令儀公)이 별록으로 들어있음을 들었다.대저 우리 安氏가 3파가 있으나 그같은 다른 계파로 나뉜 것은 알지 못하겠고 동원(同源)이 멀어져 각각 갈리게 되고 상세한 내막도 알 수 없다.세파 가운데 1파는 문하찬성사 연흥부원군으로 양양(襄良)공 휘 漢平을 시조로 하는데 이파가 참판공 鎭氏(1617-1685<숙종>)의 파이다. 또 하나는 죽성군 휘 원형(元衡) 시호가 문혜(文惠)공으로 시조로 삼았는데 우리집 즉 복야공파이다.(益大)공이 (1676-1756<영종>) 문혜공의 후예인 致宅의 말에 이르기를 문혜공은 거의 19대조로서 고려시대에 순흥으로 옮겨 죽성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죽산으로서 성관(姓貫)을 삼았는데 비록 그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하드라. 그런즉 文惠公 파는 같은 성이나 계파가 다른 것을 알겠고 양양공과 복야공은 그 근원이 같고 흐름이 먼것의 자세함과 갈라진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益大공도 이를 또한 의아하게 여기더라 양양공의 후예인 允吉氏(1691-1751<영조278>)가 그 계파를 조사한후 대답하여 이르기를 양양공이 자기의 15대조가 되는데 양양공 이상의 세계는 상세하지 않다. 고로 양양공으로 시조를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즉 양양공과 복야공 양파 자손 대수의 원조는 분명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양양공이 사후 여조에 벼슬한 두 분이 모두 이름을 날렸는데 같은 왕밑에서 벼슬을 한 것은 알 수 없고 양공의 세계(世系)에 분파가 언제이었는지 반듯이 문헌에 있어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증조부[皇考(부친)의 오역임]이신 진사공께서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동종 같은 성 같은 본관이 있음을 들으면 찾아가 그 세파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참고 하였는데 고려 말 족보 서문에 이르기를 옛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에 중국인 李公(諱)瑗公의 아들 휘 邦傑 邦俊 邦俠 삼형제가 신라 敬文王때 왜란이 일어나자 나아가 이를 평난하여 나라와 국민을 편안히 한 공으로 安氏姓을 받았는데 邦傑公은 본관(本貫)을 順興으로 邦俊공은 본관을 竹山으로 邦俠公은 본관을 廣州로 하였다 [麗末譜序曰 在昔唐憲宗元和二年丁亥 中原人李公諱瑗之子 諱邦傑邦俊邦俠三兄弟 公出于新羅敬文王時適値倭亂有靖國安民之功 故賜姓安氏自 邦傑公始貫順興 邦俊公始貫竹山 邦俠公始貫廣州云].
    대저 竹山 安氏는 준(濬)공을 비조로 하는 것이 있고 원형(元衡)을 비조로 하는 것이 있어서 濬公을 비조로 하는 것이 연창위파(延昌尉派) 안씨(安氏)라 하고 그 대수를 조사하면은 우리 복야공 이전의 형제가 남아 있는데 그 행적과 근본은 연구해 보면은 같은 동족이나 문헌으로 증명할 수가 없다.

    위 번역문에서는 고려말 족보를 본 사람이 서문 찬자의 증조부라고 했으나 원문은 황고(皇考)로 되어 있고, 이는 선고(先考)를 높여 이르는 말이므로 실제로는 부친이 본 것으로 번역상의 오류이다. 찬자의 증조부는 안세풍(安世豊, 1665-1742)으로 1693년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이기는 하다.
    을축보는 복야공(僕射公, 諱 令儀)을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 문중의 첫 족보이며, 서문에 농서이씨 설을 언급은 하고 있지만, 자손록은 시조를 복야공(僕射公)으로 했음.
    위 서문의 지은이는 농서이씨설의 출처가 자신의 부친이 본 고려말 족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족보의 실물이 전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개 이런 위설을 기록한 문건들은 옛날 족보를 사칭하기 마련이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저 무렵 발간된 죽산안씨 족보들은 조종운의 씨족원류(1680년경)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고려말 족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것이 정말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이라면 순흥안씨 시조는 방걸, 광주안씨 시조는 방협으로 바꾸어야 하는가?

  3. 광주안씨 서령공파 보령(保寧) 문중 가첩 : 1800년 전후

    始祖瑗 姓李氏 本隴西 唐元宗 元和二年丁亥 東入朝鮮 江原道 松岳山下 有三子 枝春 葉春 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時 兄弟三人 共平其亂 自國命其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改名 邦俊 邦傑 邦俠 一封順興 二封廣陵 三封竹城

    邦傑 廣州人 邑人殺其主叛 公倡大義討平之 麗朝拜大將軍 封廣陵君

    맨 처음에 농서이씨설을 적고, 다음으로 시조부터 조선말까지의 계보와 간단한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중간에 필체도 바뀌므로 정확한 연대를 판단하기 어렵다. 처음 필체가 바뀌는 부분까지만 고려하면 순암공 변무보다 연대가 조금 앞설 가능성도 보인다. [가첩 원본은 죽산안씨 측이 소장하고 있다.]

    농서이씨설에 시조가 신라 경문왕 때 분이라고 하고, 다음의 시조 기록에는 고려 대장군이라고 하여 두 기록이 시대가 어긋난다. 또 방준(邦俊)을 순흥군(順興君)이라고 하여 순흥안씨 시조처럼 말하고 있으나, 홍미(弘美)공 동생에 순흥시조 자미(子美)공을 기록하여 혼란스럽다. 결세부분 계보에 호(虎)가 있고, 전중시어사공을 온양에 묘소가 있던 안수(安綏)와 혼동하여 부친으로 길상(吉祥), 조부로 생(生)을 삽입하여 기록하였다. 전통적 광주문중 기록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전후 일관성도 없는 잡란스러운 문건이다.

    이 가첩의 정확한 연대가 밝혀져야 확실한 말을 할 수 있겠으나, 위 1805년 죽산보 서문과 함께 고려해 보면 농서이씨설이 처음 나올 때 3형제를 설정한 것은 각각 순흥, 광주, 죽산 3문중의 시조로 1:1로 연결시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1로 연결하는 방법도 제각각이고, 나중에 광주-순흥은 같은 뿌리로 바뀌어 방협은 불필요하게 되니 헛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작된 설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가첩 이미지 보기 :
    http://cafe.daum.net/an8414/HqRZ/27


  4. 탐진안씨 족보(耽津安氏族譜) : 1830년

    김시찬(金是瓚), 탐진안씨 족보서(耽津安氏族譜序) : 1830년
    일일재선생문집(一一齋先生文集) 卷之三 序 : 한국국학진흥원

    ....안씨는 중국 농서(隴西)에서 동으로 왔으며, 신라말에 나라를 평안케한 공이 있어 안씨를 사성 받았다. 형제가 분봉(分封)하여 광주, 순흥, 죽산, 탐진(耽津), 주천(酒泉) 등 모든 후손들이 봉호(封號)를 본관으로 분파하였다......

    耽津安氏族譜序
    蘇明允譜其族。而士大夫爭慕效之。延及我東名家舊族。莫不有譜。盖亦敬宗睦親之義也。維安氏。出隴西而東。當羅季。有安國勛。賜安氏。分封兄弟。曰廣州。若順興。若竹山。若耽津。酒泉。諸孫皆以分派封號爲貫。若文成公之從享聖 鰲城君之祔享崇義。無容議爲。若蘆溪。磊谷。伴鷗齋。三賢之儒行懿範。忠孝之或感倭或感虎。己令人聳慕。而其中六世七孝。何其懿也。三世之孝。古人以爲難。而表以著之。曰孝子三世。矧七孝之連膺旌棹。或除職。或贈爵。褒典己焜燿哉。吾知是譜之出安氏諸公。不但爲家傳之善箕。裘將爲邦人之所矜式。寧不韙哉。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永言配命。自求多福。諸公其亦知所勉哉。於是。樂爲之言
    上之三十年庚寅內火下澣 光山後人 金是瓚 謹序

    탐진파보 1830년판(탐진안씨) 경인보 서문 : 1830년 경인 9월

    김시찬(金是瓚, 1754~1831)
    광산인(光山人), 자(字) 황중(黃中), 호(號) 일일재(一一齋), 거(居) 예안(禮安) 오천(烏川) 부륜의 후손, 성익의 자로 1792년 학행으로 동몽교관에 천거(薦擧)되었고 그 뒤에도 봉사(奉事), 직장 등 여러 차례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만년(晩年)에 백승당을 지어 스스로 명함의 만생이요, 소대의 한인이라, 자처하며 아야순, 이우 등과 학문으로 서신왕래 하였으며 경전이외에 산천(山川), 도리(道里) 및 의문(儀文)의 상변, 만성보(萬姓譜)의, 계열 등에 해박함이 있어 많은 문하생(門下生)이 강론을 청하였다. 문집(文集) 6권3책이 전한다

    蘇明允은 소동파(蘇軾:蘇東坡)의 아버지 소순(蘇洵). 중국에서 족보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위 서문에 이어서 아래와 같은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安氏姓貫總錄
    新羅景文王時 中國隴西李瑗 與其子 花春 枝春 葉春 三人 出東 有安國之勛 賜姓安氏 改名 邦傑 邦俊 邦俠 分封 廣州 竹山 順興 等地

    分封總錄
    廣州安綏 廣州君 邦傑 十四世孫 守之 司正 一派
    順興安子美 以廣州人 出系 追封 曾孫文成公裕 得權一派 奮一派
    竹山安令儀 邦俊七世孫 濬 少監 一派 元衡 侍中 一派 漢周 判事 一派 珪 政堂文學 一派 挺奇 司正 一派 繼芳 別將 一派
    酒泉 原州 安挺芳 戶長 仲敬 功臣 一派

    奧惟我安氏 有諱瑗之子 兄弟 自隴西而 出海東 新羅景文王時 有大勳勞於國家 故賜姓安氏 以爲分封曰 廣州也 順興也......
    後孫 碩衡 謹識

    1830 탐진안씨 족보 원문 이미지 (압축파일)

  5. 순흥안씨 판관공(判官公) 파보 전의록(傳疑錄) : 1850년경
    간행 연대는 미확인이나, 후반부의 내용이 근래 간행되는 순흥안씨 족보의 전의록에도 나오는 것으로, 원출전은 순흥 경인보(庚寅譜:1830)이므로, 1830년 이후가 확실하며, 1850년경으로 추정됨. 원문은 첨부파일 참고.

    남포(藍浦) 안정진(安廷晉)의 보첩에 이르기를 중국인 이원(李瑗)이 당(唐) 원화(元和) 2년 정해(丁亥)에 동으로 와서 강원도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살았는데, 아들 셋이 있어 장남은 지춘(枝春), 차남은 엽춘(葉春) 막내가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왜란 때에 3형제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賜姓)받고, 이름을 고쳐 방준(俊封)은 죽산(竹山), 방걸(邦傑)은 광주(廣州), 방협(邦俠) 죽성(竹城)에 봉군되었다. 방걸(邦傑)의 관직은 대장군(大將軍) 이며.. 운운(云云) 하였다.
    을유보(乙酉譜)에 이르기를....[이하는 광주 문중의 처대공이 충주에서 등사해온 광주-순흥 분관계보(광주 12대 결세 계보)에 대한 언급임]....

    藍浦安廷晉譜牒曰 李瑗 中原人 唐元和二年丁亥 東入 江原道 松嶽山下 有三子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 以平亂功 賜姓安氏 仍改名 邦俊封竹山 邦傑封廣州 邦俠封竹城 邦傑官大將軍云云
    乙酉譜曰 廣州安氏鼻祖 大將軍下 舊有缺世 今巧其新譜別編 始於大將軍下 繼以 子國信 門下侍郞 子虎 此則見藍浦支譜 子礪仲 門下侍郞 子輔平 內史侍郞 子憲思 僉議中贊 子武成 平章事 子慶立 僉知參事 子石昌 中書令 子弼夢 內史令 子弘美 門下侍中 以吾始祖 護軍公 諱子美 書於弘美弟行 而註以 順興安氏始祖 以爲得於順興刊板舊譜云 此所謂舊譜乃吾安之所不見者 則其言 姑無稽旣有刊行文字云 恐爲百世之疑 故玆卞明云
    今按廣州安順菴鼎福所著別錄曰 廣州安氏自大將軍以下 典農寺尹 以上缺世 原州宗人處大 往忠州順興安氏外孫金姓人家 見順興安氏刊板舊譜 則亦以廣州君爲始祖 處大遂謄 送于宗中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而偕 往金氏家 則順興舊譜 已入回祿 其家移居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俟後日云
    此舊譜似是丙午前譜也 吾宗人亦有得見 其板本謄來 護軍公以上九世則 忠鄕之有 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廣州安氏之所不敢信者 亦未敢遽信 而姑錄 以待後之知者云 今姑竝記之


  6. 안재향(安在享) 편, 순흥안씨 세보 초(順興安氏世譜抄) : 1871년
    역통(한국학중앙연구원)

    안씨의 본성은 이씨로 시조 안경(安瓊)은 중국인이다.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8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정착했다. 세 아들이 있어 장남은 지춘, 차남은 엽춘, 그 다음은 화춘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864년) 갑신왜란 때 3형제가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케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받았다.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에, 엽춘은 방걸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안씨 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형제가 이어 광주군에 봉해졌다는 것은 의문이 있다.
    시조 자미(子美)는 광주군 방걸의 10세손이다.

    安氏本姓李氏 始祖安瓊中國人 唐憲宗元和三年丁亥 東入於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倭亂 三兄弟謂有靖國安民之功 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封竹山君 葉春改名邦傑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封廣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兄弟繼爲廣州君可疑
    始祖子美廣州君廷傑十世孫 (廷傑은 邦傑의 착오?)

    이 무렵 농서이씨설은 위와 같은 형태로 정형화 되었던 것 같다. 1907년 노상직(盧相稷)의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나 1908년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24년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실린 농서이씨설은 위와 단지 글자 몇 자만 다를 뿐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7.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임하필기(林下筆記)》: 1872년
    제18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씨족(氏族)

    한국고전번역원(구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

    경덕왕(景德王) 14년에 당나라의 김충(金忠)이 폭풍에 휩쓸려 축산도(丑山島)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왕이 그가 남쪽에서 왔다고 하여 남민(南敏)이라는 성명을 하사하였다. 소성왕(昭聖王)의 어머니 신씨(申氏)는 김신술(金神述)의 딸로 같은 성인 것을 혐의쩍게 여겨 그 아비의 이름 가운데 신(神) 자를 따서 씨(氏)를 삼았으니 신(神)과 신(申)은 같은 운(韻)이기 때문이었다. 경문왕(景文王)은 왜적을 평정한 공로로 이지춘(李枝春) 등 삼형제에게 안씨(安氏) 성을 하사하였다. [景文王 以平倭功 賜李枝春等 三兄弟 姓安氏]
    임하필기는 이유원이 1871년 가을 ~ 1872년 겨울 간에 집필함.(한국고전번역원 해제)


  8. 1883년 강진(탐진)안씨족보(康津安氏族譜)
    安氏分封總錄
    安氏之先 本中國隴西李氏也 有諱椀 唐憲宗元和二年丁亥 與三子 枝春 葉春 花春 出東 新羅 景文王朝 有安國功 賜姓安氏 改名邦俊 邦傑 邦俠 分封 竹山 廣州 竹城 而自廣州九世 至護軍公 子美 移封順興 五世至 謙齋文淑公諱牧 有三子 元崇 元衡 元崙 分封 順城 竹城 康津
    上系圖
    始祖李椀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丁亥 與三子 邦俊 邦傑 邦俠 出東 新羅 景文王朝 有安國功 賜姓安氏 分封 竹山 廣州 竹城) - 子 安邦傑 (大將軍 銀靑光祿大夫 封廣州君 配金氏) - 子 國信 (門下侍郞) - 子 虎 (檢校軍器監正 尙書員外郞 光祿大夫 配朴氏) - 子 礪仲 (門下侍郞 配全州李氏) - 子 輔平 (吏部尙書 配金氏) - 子 思憲 (僉議中贊 配李氏)- 子 茂成 (平章事 銀靑光祿大夫 有二子慶立石立) - 子 慶立 (參知議事 光祿大夫 有一男弼夢) - 子 弼夢 (太保內使令 有二子 弘美子美) - 子 子美 - 子 永儒 - 子 孚 - 子 裕 - 子 于器 - 子 牧 - 子 元崇 (封順城君 諡文惠), 子 元衡 (封竹城君 諡文惠), 子 元璘 (封耽津君)
    上系圖跋
    (위 내용에 대한 추가 언급이 있으나 새로운 내용은 없음)....後孫環謹跋
    종래의 농서이씨설을 적고, 신죽산 및 탐진안씨가 순흥분파임을 주장함. 이어 나오는 상계도(上系圖)에 순흥이 광주분파임을 기록함.

    광주안씨 상계에 관직 품계와 배위 기록등 광주안씨들의 전통기록에는 없는 출처미상의 인물정보가 처음으로 나타나며, 조작된 기록으로 의심된다. 이와 유사한 기록들이 1976년 죽산안씨 대동보에도 보이므로, 이런 것이 그 출전일 가능성이 있다.


  9. 안도징(安道徵:1616~1678), 점리와집(點离窩集) : 1898년 간행
    안도징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字)는 태화(泰和), 17세기의 학자이다.

    안씨의 광주순흥 분파 세계도의 끝에 씀(敬書安氏廣州順興分派世系圖後)
    안씨의 본성은 이씨(李氏)로 휘(諱)가 원(瑗)인 분이 당 헌종 2년 동쪽으로 와 본국 송악산 아래 살았다. 아들 셋이 있어 장남은 지춘(枝春), 차남은 엽춘(葉春) 막내가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 흑치(黑齒)의 난을 당해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안국공신으로 안씨를 사성(賜姓)받고, 이름을 고쳐 지춘은 방준(俊封)으로 죽산군(竹山君), 엽춘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 화춘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군되었다. 이후 그 자손들이 안씨가 되었다.
    ...[이하는 광주-순흥 분관 계보에 대한 것으로 번역 생략]...
    죽계후손(竹溪後孫) 안도징(安道徵) 배수근서(拜手謹書)

    敬書安氏廣州順興分派世系圖後
    惟我安氏本李氏 而有諱瑗 唐憲宗二年 東入于本國松嶽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當黑齒亂 兄弟三人 以平亂 故以爲安國功臣 賜姓安氏 因更名 枝春爲邦俊封竹山君 葉春爲邦傑封廣州君 花春爲邦俠封竹城君 其後爲其子孫者 仍爲安氏

    廣州君 有子國信 門下侍中 子礪仲 門下侍中 子輔平 內史侍郞 子憲思 僉議中贊 子武成 平章事 子慶立 參知議事 子石昌 中書令 子弼夢 太保內史令 子 長子美 上護軍 其子孫爲 順興人 次弘美 門下侍郞 其子孫仍爲廣州人 吾安氏 與廣州安氏分派者 始此

    按廣州別錄云 原州居安處大 往忠州圍柳面 順興安氏家 見其舊譜刊板 則順興安氏 亦以廣州君邦傑爲始祖 而歷十世至諱子美弘美兄弟 子美爲順興安氏中始祖 以仍貫順興 弘美以下至曾孫諱忠季 乃廣州君直派也 處大謄送于廣州宗人 而宗人不敢遽以專信 更送安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 則順興安氏舊譜 已入於煨燼中云 故姑爲別錄云 余今見廣州安氏世譜 則有始祖子美 以上十世 故姑依原州居安處大別錄而取而錄之 以竢後之知者
    竹溪後孫安道徵拜手謹書

    농서이씨설이 들어 있으나, 그 뒤에 언급된 안처대(安處大)공, 안신형(安信亨, 1692-1760)공 등이 안도징(1616~1678)공보다 후대인 1700년대의 인물이고, 광주 결세 12대 계보(광주-순흥분관 계보)는 1739년 광주안씨 기미보에 처음 수록되어 알려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끝에 안도징공이 지었다고 해 놓았지만 후대에 누군가가 위작하여 끼워넣은 것이 분명하다. 책의 간행 연도인 1898년경 다른 사람이 지었을 것이다.

    점리와집의 이 글 조금 앞에 있는 순흥안씨족보서(順興安氏族譜序, 1659)에는 이원(李瑗)과 관련한 어떤 이야기도 없다. 위와 같은 위작 문건이 나오는 것은 농서이씨설이 예로부터 전해왔다고 볼만한 근거 문헌이 없었으므로 이를 조작해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작문건은 역으로 농서이씨설이 근거가 없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 點离窩先生文集

  10. 노상직(盧相稷, 1855-1931) 編,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 1907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안씨는 권4 p.112

    [安氏]本姓李氏 始祖安瑗中國人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於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平亂 故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 封竹山君 葉春改名邦傑 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 封廣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각 본관별 안씨 주요 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맨 처음에 안씨 유래로 위와 같은 농서이씨설을 적었다. 내용은 앞서 나온 안재향(安在享) 편 순흥안씨세보초(順興安氏世譜抄, 1871)와도 거의 모든 글자가 같으며, 아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와는 한 글자만 다르고 완전히 같다 (東入-->東入, 葉春의 葉자를 다르게 쓴것까지 같음. 葉 -> ). 번역은 위의 순흥안씨세보초나 아래 증보문헌비고를 보라. 1800년대 후반에 이와같이 정형화된 표현이 만들어져 있었던 증거이다.

  11. 1907년 신죽산안씨족보 동국안씨세계(東國安氏世系)
    始祖姓李氏諱椀 或稱瑗 中原隴西人也 封隴西君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子三人 長曰枝春 仲曰葉春 季曰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 倭寇之亂 兄弟三人 仗義平亂 故謂之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曰 邦儁 邦傑 邦俠 其前東國元無安氏
    [페이지 난외의 윗 쪽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음.]
    李氏諱瑗 椀之后 此誤 又諱璜 瑗之弟 固城李氏云
    安邦儁 (封竹山君 新羅 憲康王 五年卒 夫人金氏光玉女) - 國輔 (版圖判書 夫人鄭氏) - 倫 (版圖判書) - 德生 (版圖判書); [邦俊 二子] 國弼
    安邦傑 (新羅 大將軍 封廣州君 配金氏 生一男) - 國信 (門下侍郞 生一男) - 虎 (檢校軍器監正 尙書員外郞 光祿大夫 配朴氏 生一男) - 礪仲 (門下侍郞 配全州李氏 生一男) - 輔平 (吏部尙書 配金氏 生一男) - 思憲 (僉議中贊 配李氏 生一男)- 茂成 (平章事 銀靑光祿大夫 生二男) - 慶立 (參知議事 光祿大夫 生一男), 石立 (中書令) - 弼夢 (太保內使令 生二男) - 子美, 弘美 (子孫因貫廣州)

    安邦俠 (新羅 副將軍 封竹城君 光祿大夫) - 國賓 (門下侍郞 生一男) - 絢(生一男) - 德培 (中書令)
    처음으로 방준(邦俊)과 방협의 후손 계보와 관직이 나타나며, 방준의 졸년이 나온다. 아직 방준과 죽산안씨 계보는 연결되지 않음. 광주안씨 선대의 계보도 약간 다르고, 관직 품계와 배위 기록은 1883년 강진안씨 족보와 유사함. 근거문헌을 밝히지 않았으며, 조작된 기록으로 의심된다.
    李瑗 -邦儁 -國輔 -倫 -德生
    -國弼
    -邦傑 -國信 - -礪仲 -輔平 -思憲 -茂成 -慶立 -弼夢 -子美
    -石立 -弘美
    -邦俠 -國賓 -絢 -德培
    농서이씨설에서 방준(邦俊)이 죽산안씨 시조라는 말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죽산안씨들과 연결되는 계보가 없어, 1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죽산안씨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것이 방준(邦俊)과 죽산안씨를 연결하는 계보를 조작해 내는 시초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12.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弘文館 : 1908
    증보문헌비고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볼 수 있음.

    (11) 권46 [補] 帝系考 7 [附] 氏族 (p.9)
    경문왕 4년 왜란을 평정한 공으로 이지춘등 3형제에게 안씨(安氏)를 사성(賜姓)함.
    [景文王四年 以平倭亂功 賜李枝春等 三兄弟 姓安氏]

    (12) 권49 [補] 帝系考 10 [附] 氏族 4 (p.57)

    안씨의 본성은 이씨로 시조 안원은 중국인이다.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8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정착했다. 세 아들이 있어 장남은 지춘, 차남은 엽춘, 그 다음은 화춘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864년) 갑신왜란 때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안씨를 사성받았다.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에, 엽춘은 방걸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안씨 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安氏]本姓李氏 始祖安瑗中國人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平亂 故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 封竹山君 葉春改名邦傑 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 封廣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원문에는 葉春의 葉 자 대신 내(초두 밑에 나무木 밑에 보일 示 / 즉 초두 밑에 柰)로 되어 있다. http://ikc.korea.ac.kr/~cnsc/hidb/char/c4/c4-4037.htm 참고]

    순흥안씨 시조 자미(子美) 보승별장(保勝別將)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追封) ○광주군(廣州君) 방걸(邦傑)의 10세손이다.
    順興安氏始祖 子美 保勝別將 追封神虎衛上護軍 ○廣州君 邦傑 十世孫

    광주안씨 시조 유(綏) 문하시중(門下侍中) ○광주군(廣州君) 방걸(邦傑)은 현리(縣吏)로 가문을 일으켰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14세손이 유(綏)이다.
    廣州安氏始祖 綏 門下侍中○廣州君 邦傑 以縣吏起家 爲大將軍封廣州君 十四世孫綏

    죽산안씨 시조 영의(令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추봉(追封) ○죽산군(竹山君) 방준(邦俊)의 7세손이다.
    竹山安氏始祖 令儀 追封尙書左僕射 ○竹山君 邦俊 七世孫
    (이후 나오느 문중인물에 安濬 少監爲一派, 安元衡 侍中 竹城君 爲一派, 등이 있음)

    ** 광주안씨 기록중에 시어사공(綏)의 관직을 전중시어사가 아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한 것은 조종운(趙從耘, 1608-1683)의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 나온 듯 하다. 강동구청 자료에서도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씨족원류(氏族源流) 저자의 착오일 것이다.

    ** 1800년대에는 죽산보다 순흥안씨들이 농서이씨설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기록을 많이 남겼다. 위 증보문헌비고의 농서이씨설 문안은 1871년 안재형의 순흥안씨세보초의 내용과 몇 글자 빼고는 동일하므로 순흥안씨들이 자료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순흥안씨들이 공식적으로는 시조 자미공 이전의 선대를 인정한 적이 없지만, 일부 사람들은 항상 다른 주장을 해왔고, 농서이씨설이 초기에 확산되는데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위 도서의 증보하기 전의 원형인 1770년 영조 때 간행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제계고(帝系考) 또는 왕계고(王系考)는 없으나 씨족에 관한 사항이 권38 예고(禮考) 16 잡편(雜編)에 있다. 여기에는 각 성씨별 내용은 없고, 사성(賜姓) 기록만 좀 나오는데, 경문왕 때 안씨 사성 기록은 없다. 증보문헌비고의 안씨 사성 바로 앞 기사

    "哀莊王六年 唐封太后叔氏爲大妃 太后奈勿王十三世孫金叔明女也 嫌於同姓 以父名叔爲氏
    [애장왕 6년에 당나라가 태후(太后) 숙씨(叔氏)를 대비(大妃)에 봉했다. 태후는 내물왕(奈勿王) 13세손 김숙명(金叔明)의 딸이다. 같은 성인 것을 싫어하여, 아버지 이름의 숙(叔)을 성씨로 했다.]
    "

    는 동국문헌비고에도 그대로 있다. 이로 보아 1908년에 기록된 경문왕의 안씨 사성 기록은 1770년대에는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국문헌비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16책의 권38 예고(禮考) 16 잡편(雜編) p.108]

    증보문헌비고는 관(官)에서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이후 많은 성씨 관련 도서들이 이를 인용하는데, 이 때문에 안씨의 농서이씨 기원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근거없는 낭설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기록들이 쌓이면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13. 죽산안씨 연창위(延昌尉) 문중(少府小監公 濬 계)의 장단파보 : 1909년

    1909년에 안명승(安明承)이라는 분이 주관하여 발간한 죽산안씨 소부소감공(少府小監公 濬)계 연창위(延昌尉) 문중 장단파보에는 함경북도 경흥에 사는 죽산 종인 안윤채(安潤采)씨의 소위 "여말세보(麗末世譜)"에 근거하여 "동국안씨구세동원보(東國安氏舊世同源譜)"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농서이씨동래설과 본관이 다른 대다수 안씨 문중의 선대를 연결하는 계보를 싣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죽산안씨들이 주장하는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의 최초 형태로 보인다. [장단파는 황해도 장단(長湍)에 거주하던 죽산안씨 일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東國安氏舊世同源譜
    李瑗
    : 姓李氏 諱一作椀 唐憲宗元和二年丁亥 入于我東松岳山下 有子三人 新羅景文王甲申倭亂 三兄弟以平亂 故王曰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 各封君 此前無安氏之姓 傳言公本中國隴西人


    邦俊 (初諱枝春 封竹山君 唐憲宗四年己丑生 僖宗六年己亥卒 享年七十一ㅇ配金光之女 墓在開城府五里 鵠嶺下乾坐) - 國輔 (版圖判書 配鄭氏) - 倫 (版圖判書 配姜氏), 伯 (出系) - 德生 (版圖判書 配金氏海之女) - 思 (平章事 配李氏) - 學謙 (字士逸 平章事 配李氏), 孟謙 (出系) - 濬 (少府小監) - 時茂 (僕射) - 世允 (小監) - 自裕 (直丞) - 漢平 (延興府院君 襄良公)

    [邦俊 二子] 國弼 - 儉 - 晩生 - 慾 - [系子]孟謙 (孟一作文) - 瀘 - 令儀 (儀一作茂 竹山二派) - 世亮 - 弘祥 - 永平

    邦傑 (初諱葉春 封廣州君) - 國臣 (臣一作信) - 俿 (按順興草譜 無此一世 而以礪石公爲國臣公之子 或失代然耶 或礪石公初諱是俿也 未知孰是) - 礪石 (石一作仲) - 輔平 - 思憲 - 武成 (武一作茂) - 慶立 - 石昌 - 弼夢 - 弘美 (此派本無載而見順興家譜追載) - 益相 - 學成 - 忠孝 - 綏 - 祉 - 壽

    [弘美 弟] 子美 (追封順興君 此順興安氏派) - 永儒 - 孚 - 裕 (文成公 晦軒) - 于器 (竹屋子) - 牧 (謙齋) - 元崇 (順興本派), 元譁 (此本無載而見順興草譜追載), 元衡 (移封竹城君 竹山三派), 元璘 (初諱元崙 封耽津君 ㅇ見李牧隱 賀三子登科詩)

    邦俠 (初諱花春 封竹城君) - 國賓 - 侚 (一作絢 未詳) - 德培 - 忠 - 彦謙


    "此世系 在於 咸鏡道 慶興居 安潤采家 而北道族人 以麗末世譜單卷更準開刊矣 昌原居 吾宗 適往潤采家 見其舊譜謄出來 傳播視諸道諸家 又至咸平羅山 羅山諸家又謄出 考諸前日記聞 則節節相符云云
    *又有竹山二派 曰漢周 曰居範 是何派歟 無所可考" : 歟(어조사 여)

    위 계보를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邦俊 -國輔 -倫 -德生 -思 -學謙 -濬 -時茂 -世允 -自裕 -漢平
-伯 [出系] -孟謙 [出系]
-國弼 -儉 -晩生 -慾 -孟謙 -瀘 -令儀 -世亮 -弘祥 -永平
邦傑 -國臣 -俿 -礪石 -輔平 -思憲 -武成 -慶立 -石昌 -弼夢 -弘美 -益相 -學成 -忠孝 -綏 -祉 -壽
-子美 -永儒 -孚 - 珦 -于器 -牧 -元崇
-元譁
-元衡
-元璘
邦俠 -國賓 -侚 -德培 -忠 -彦謙
  1. 장단파보에는 위와 같은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나, 부기된 설명으로 보아 홍미(弘美)공 이하의 광주안씨 계보와 순흥 문중의 원화(元譁)는 소위 안윤채(安潤采) 여말세보(麗末世譜)에는 없던 것을 순흥가보(順興家譜) 또는 순흥초보(順興草譜)를 보고 추가로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안력(安)이라는 사람이 함경도 경흥에 사는 죽산 종인 안윤채씨가 가지고 있던 고려말 족보(麗末世譜)를 등사해와 여러 도의 여러 집안에 전파하고, 전라도 함평 나산의 여러 집에서 보고 등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위 계보의 죽산안씨 복야공파 마지막 인물 永平은 永年의 착오로 보인다.]

    이것은 죽산안씨 동원보의 초기 형태로 보이며, 장단파가 작은 문중이라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1923년 소감공파 죽산안씨세보에 안윤채(安潤采)씨가 가져온 족보를 토대로 안씨동원보라는 이름으로 수록하면서 죽산 문중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원문 이미지 보기 ]


  2. 1910년 탐진안씨세보(耽津安氏世譜) 안씨세계(安氏世系)
    安氏世系
    始祖姓李氏諱椀 中原隴西人也 封隴西君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子三人長曰枝春 仲曰葉春 季曰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倭寇之亂 兄弟三人仗義平亂 故謂之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曰 邦俊 邦傑 邦俠 封 竹山 廣州 竹城君 其前東國元無安氏之姓
    二世 安邦俊 封竹山君 新羅 憲康王五年 乙亥卒 享年七十一 夫人金氏光玉之女 墓在開城府五[里 鵠嶺下乾坐?]
    방준(邦俊)에 대한 인물정보로 생졸년, 배위, 묘소 등 1909년 죽산안씨 장단파보에서와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함.


  3. 남정섭 (南廷燮), 조선과환보(朝鮮科宦譜) : 1914년
    역통(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과환보(v5 147항 p.74b)의 순흥안씨 음사편(順興安氏蔭仕篇)에 있는 계보

    안방걸(安邦傑) [주: 신라시대 농서(隴西) 이완(李椀)이 처음 동국(東國)으로 왔는데, 아들 셋이 왜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공으로 안씨(安氏)성을 받음.] ...이하 번역 생략...

    安邦傑 [주: 羅朝 隴西 李椀 始出東國有子三人以平倭 安國 勳受姓 安氏 ] 國信 [주: 侍郞 邦傑 子 ] 虎 [주: 光祿 國信 子 ] 礪仲 [주: 侍郞 虎 子 ] 輔平 [주: 尙書 礪仲 子 ] 思憲 [주: 中贊 輔平 子 ] 茂成 [주: 平章事 思憲 子 ] 慶立 [주: 光祿 茂成 ] 弼夢 [주: 太史令 慶立 子 ] 子美 [주: 封 上護軍 弼夢 子 ] 弘美 [주: 子美 弟因貫 廣州 ]


  4. 김정술등편(金廷述等編), 동국만성잠영보(東國萬姓簪纓譜) : 1916년
    역통(한국학중앙연구원) 동국만성잠영보(東國萬姓簪纓譜)

    순흥안씨(順興安氏, v4 p.52b)
    당(唐) 농서인(隴西人) 이완(李椀)이 동쪽 신라(新羅)로 와서 살았는데, 아들 죽산군(竹山君) 안방준(安邦俊), 광주군(廣州君) 방걸(邦傑) , 죽성군(竹城君) 방협(邦俠) 3형제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안씨를 사성(賜姓) 받았다. 방걸(邦傑)의 아들 국신(國信)은 시랑(侍郞)......
    順興安氏
    李椀 唐隴西人 東來新羅居 子安邦俊竹山君 邦傑廣州君 邦俠竹城君 三兄弟 仕新羅 賜姓安氏 邦傑子 國信 侍郞..



  5. 1917년 탐진안씨족보(耽津安氏族譜) 안씨세계(安氏世系)
    安氏世系
    始祖姓李諱椀 中原隴西人 封隴西君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倭寇之亂 兄弟三人仗義平亂 故謂之安國臣 賜姓安氏 因更名曰 長邦俊封竹山君 仲邦傑封廣州君 季邦俠封竹城君 東國始有安氏
    竹山派
    安邦俊 (封竹山君 新羅 憲康王五年 乙亥卒 享年七十一 夫人金氏光玉女 墓在開城府五里 鵠山嶺下乾坐) - 子 國輔 (版圖判書 夫人鄭氏) - 子 倫 (版圖判書 夫人金氏), 伯 - 子 德生 (版圖判書 夫人金氏 光海女) - 子 思 (平章事 立祠寧城院 夫人李氏) - 子 學謙 (初諱千謙, 字士文 官平章事 夫人朴氏) - 子 濬 (平章事 一云少府 夫人鄭氏) - 子 必茂 (吏部侍郞 一云 諱時茂 官軍器監) - 子 世允 (官侍中 配位失傳) - 子 自裕 (尙書令) - 子 漢平 (平章事) - 子 社卿
    [邦俊 二子] 國弼 (門下侍郞 光祿大夫) - 儉 (中書令 夫人金氏) - 晩生 (中書令 夫人李氏) - 慾 (中書令) - 子 文謙 (光祿大夫) - 子 瀘 - 子 令茂 (大司馬) - 子 世亮 (內史令 配位失傳) - 子 弘詳 (太史令) - 子 永年 (配朴氏) - 子 社相
    廣州派
    安邦傑 (官大將軍 銀靑光祿大夫 封廣州君 夫人金氏) - 子 國信 (門下侍郞) - 子 虎 (檢校軍器監正 尙書員外郞 光祿大夫 夫人朴氏) - 子 礪仲 (門下侍郞 夫人全州李氏) - 子 輔平 (吏部尙書 夫人金氏) - 子 思憲 (僉議中贊 夫人李氏) - 子 茂成 (官平章事 銀靑光祿大夫) - 子 慶立 (參知議事 光祿大夫), 石立 (中書令) - 子 弼夢 (太保內使令) - 子 子美(移封順興), 弘美 (因貫廣州)
    竹城派
    安邦俠 (官副護軍 光祿大夫 封竹城君 夫人李氏) - 子 國賓 (門下侍中) - 子 絢 - 子 德培 (中書令, 夫人朴氏) - 子 忠 (吏部尙書 夫人李氏) - 子 彦謙 (門下侍郞 夫人李氏)
    傳疑錄
    [앞서 나온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의 전의록을 전재하여 내용이 대동소이함]
    1909년 죽산안씨 장단파보의 동국안씨구세동원보(東國安氏舊世同源譜)와 거의 동일한 계보를 싣고 있으나, 거기에는 없는 방준 2자(邦俊 二子) 국필(國弼) 계보와 광주안씨 계보, 방협(邦俠) 후손 계보 인물들의 관직 품계, 배위 기록등이 나타난다. 기록의 출처는 밝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1909년의 안윤채 고려말 족보(?)와 계보가 완전히 같고, 인물 정보만 좀더 부가되어 있으므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6. 1923 죽산안씨 세보(竹山安氏 世譜)의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

    소부소감공(少府小監公, 濬) 문중의 족보로, 두번째 범례에 처음으로 종래의 농서이씨설과 함께 아래와 같이 죽산안씨 두 문중은 물론 모든 안씨 문중을 연결하는 계보를 수록했다. 이것이 소위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로, 당시에는 자신들도 믿기 어렵다고 했다(尙難徵信). 그런데도 죽산안씨들은 이에 대한 별다른 고증도 없이 1976년에 이를 정식으로 자신들의 시조 기록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과 같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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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안씨 동원세계(東方安氏同源世系)
    경흥(慶興) 종인(宗人) 윤채(潤采)의 가록(家錄)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믿기 어렵다(尙難徵信). 고로 각 편편(編編)을 첫머리에 임시로 싣는다.

    東方安氏同源世系
    出於 慶興宗人 潤采家錄 而尙難徵信 故姑爲各編編于卷首

    徵信(징신) : 의지하여 믿음. 증거로 믿음. 진실을 증거함.
    姑 : 잠시, 잠깐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
    이원(李瑗 : 一諱 琬)공은 중국(中國)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唐憲宗) 원화 2년(元和 二年,서기 807) 신라 애장왕 7년 정해(丁亥)에 우리나라에 와서 개성의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정착하셨다. 원(瑗)공 에게 세 아들, 맏이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 화춘(花春)공이 계시니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4년(서기864) 갑신년(甲申年)에 외란(外亂)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 분들이 출정(出征)하여 이를 평난(平亂) 하시었다. 이에 국왕(國王)이 삼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하시고 안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바꾸어(更名) 주시며 아울러 봉군(封君)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安氏가 시작 되었다.

    安氏同源譜
    李瑗 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 新羅哀莊王 七年 丁亥 入我東居松岳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 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皆封君東國有安氏 自此始焉.

    [다음에 죽산 두 문중(준, 영의)과 광주-순흥(방걸), 죽성(방협) 문중등 모든 안씨 문중을 연결하는 계보를 실음.]

    安邦俊 (前諱枝春 唐憲宗四年己丑生 封竹山君 唐僖宗六年 新羅憲康王四年己亥卒 享年七十一ㅇ配金氏 光玉女 墓開城府五里許鵠嶺下乾坐 失傳) - 國輔 (版圖判書 配鄭氏) - 倫 (版圖判書 配姜氏), 伯 (出系) - 德生 (版圖判書 配金氏 光海女) - 思 (平章事 配李氏) - 學謙 (字士逸 平章事 配李氏), 孟謙 (出系) - 濬 (少府小監 配鄭氏)

    [邦俊 二子] 國弼 - 儉 - 晩生 - 慾 - [系子]孟謙 (孟一作文) - 瀘 - 令儀 (儀一作茂 尙書左僕射)

    安邦傑 (前諱葉春 封廣州君) - 國臣 (臣一作信) - 俿 (按順興草譜 無此一世 而以礪石公爲國臣公之子 或失代而然歟 或礪石公初諱是俿而重書 未詳) - 礪石 - 輔平 - 思憲 - 武成 (武一作茂) - 慶立 - 石昌 - 弼夢 - 弘美 - 益相 - 學成 - 忠孝 - 綏 - 祉 - 壽

    [弘美 弟] 子美 (追封順興君) - 永儒 - 孚 - 裕 (號晦軒 諡文成) - 于器 (號竹屋子) - 牧 (號謙齋) - 元崇, 元譁, 元衡 (移封竹城君), 元璘 (初諱元崙 封耽津君ㅇ見李牧隱 賀三子登科詩)

    安邦俠 (前諱花春 封竹城君) - 國賓 - 侚 (一作絢 未詳) - 德培 - 忠 - 彦謙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安邦俊 -國輔 -倫 -德生 -思 -學謙 -濬
-伯 [出系] -孟謙 [出系]
-國弼 -儉 -晩生 -慾 -孟謙 -瀘 -令儀
安邦傑 -國臣 -俿 -礪石 -輔平 -思憲 -武成 -慶立 -石昌 -弼夢 -弘美 -益相 -學成 -忠孝 -綏 -祉 -壽
-子美 -永儒 -孚 - 珦 -于器 -牧 -元崇
-元譁
-元衡
-元璘
安邦俠 -國賓 -侚 -德培 -忠 -彦謙
  1. 위의 안씨동원보는 1909년 죽산안씨 장단파보의 동국안씨구세동원보(東國安氏舊世同源譜)와 같이 안윤채씨의 족보를 근거로 하고 있으나, 내용은 유사하지만 약간 다르며, 새로운 내용도 추가되어 있다. 안윤채씨의 족보는 위에서는 그냥 가록(家錄)이라 하고 있으나, 다른 곳에서도 보이는데, 고려말 족보라고 하고 있다. 보다시피 당시는 죽산안씨 자신들도 믿기 어렵다며 실었는데, 1976년 죽산대동보에는 이것이 공식적인 죽산안씨 상대 족보로 편입되고, 방준이 죽산 두 문중의 통합시조로 된다. 위의 안윤채 가록은 진짜 고려말 족보가 아니라 조선말 또는 일제시대에 지어낸 위보(僞譜)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유는 많지만 한가지만 들어보면 이것이 죽산문중 고려말(?) 족보임에도 광주-순흥 안씨는 계보를 고려말까지 자세히 적은 반면에 자신들 문중 계보는 정확히 새로운 시조 방준으로부터 종전에 시조로 하던 소감공과 복야공까지만 적고 있다. 정상적인 족보라면 죽산문중 계보도 고려말까지 나오는 것이 당연한데, 왜 종전 시조까지만 나오겠는가? 이것이 바로 일제시대에 고려말 족보를 사칭하고 나타난 족보의 출현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말 죽산 선조들이 초능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후손들이 계보 연결하는데 필요한 정보가 정확히 거기까지인 줄 미리 알고 저런 족보를 남겼단 말인가? 그 외에도 저 고려말(?) 족보에는 새로운 죽산 상대계보 외에는 종전까지 알려진 고려말 죽산 선조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단 한 글자도 없다. 정확히 죽산 두 문중의 계보 연결을 위한 내용만 담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조작된 족보라는 확정적 증거이다. 그 외에도 위에 나오는 판도판서(版圖判書)라는 관직은 고려말 공민왕 때의 것으로, 신라말 고려 초의 사람이 그런 관직에 있었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또 신라말로 부터 1100년이나 지나 처음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시조 방준의 생졸년이 809-879 로 정확히 나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위 1923년(癸亥.大正12년) 간행 "산안씨세보(1-5책)"는 금속활자 刊임.
    1917년 (丁巳, 大正6년) 간행 "죽산안씨세보 (單)"에는 위와 같은 기록은 없고, 소감공(준)을 시조로 하여 그 이후 계보만 있음.


  2. 윤창현찬(尹昌鉉纂),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 1924년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 안씨가 나오는 첫 페이지 (74b) (역통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씨(安氏)는 124본이 있으며, 계통은 중국 무릉에서 나왔다...(이후 중국 안씨 소개)..
    ○ 본성은 이씨로 시조 안원은 중국인이다.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8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정착했다. 세 아들이 있어 장남은 지춘, 차남은 엽춘, 그 다음은 화춘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864년) 갑신왜란 때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안씨를 사성받았다.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광주군(죽산군이라고도 함)에, 엽춘은 방걸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고 광주군(죽주군이라고도 함)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안씨 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安氏有百二十四本 系出中國武陵....
    ○ 本姓李氏 始祖安瑗中國人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平亂 故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 封廣州君 一云竹山君 葉春改名邦傑 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 封廣州君 一云封竹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다음에 아래와 같은 각 문중별 초기 계보를 실었는데, 내용은 위 안씨동원보에 나오는 것과 유사하나 약간의 글자 차이가 있다. (번역 생략)]

    ○ 一云邦俊(竹山君 憲康王五年 己亥 卒 享年 七十一 配金氏 父光玉) 子國輔 (版圖判書 配 鄭氏) 子倫(版圖判書 配姜氏 父夢會) 子德生(版圖判書 配金氏 父光海) 子思(平章事 配李氏) 子學謙(子濟 平章事 娶朴氏 竹山始祖) 二子孟謙(岩九寸叔慤) 邦俊二子國弼 子儉 子晩生 子慾系子孟謙 子瀘 子令儀(竹山始祖)

    ○ 邦傑(廣州君 大將軍 后分爲廣州安氏) 子國信(門下侍中) 子虎(尙書員外郞) 子礪仲(門下侍中) 子輔平(內史侍郞) 子思憲(僉議中贊) 子武成(平章) 子慶立(參知政事) 子石生 (中書令) 子弼夢(內史令) 子子美(順興始祖)

    邦俠 子國賓 子侚 子德培 子忠 子彦謙 (此派.不知何.派之先 而系是久遠文獻 故幷錄之以備后考)

    다음에 아래와 같이 위 내용의 출처를 적었다.

    "오른 쪽은 경주군 죽산 안윤채가 여말어본고보(麗末御本古譜)를 가지고 서울에 와 창원 사는 순흥 안중력과 만나 서울 집에서 등출한 것이다.
    右 慶州君 竹山安潤彩 持麗末御本古譜來京 昌原居 順興安重瓅 相逢 京邸謄出"

    이라 한 후 그 다음에 아래와 같은 각 본관별 시조 기록이 있음.

    順興安氏始祖 子美 保勝郞將 追封神虎衛上護軍 ○廣州君 邦傑 九世孫
    廣州安氏始祖 邦傑 大將軍 廣州君 ○邦傑 九世孫 弘美(中郞將) 弘美弟子美(移籍順興)
    竹山安氏始祖 令儀 追封尙書左僕射 ○竹城君 邦俊 七世孫

    ------------------------------------------------
    조선씨족통보는 비교적 자주 인용되는 성씨관련 도서인데, 여기도 역시 안윤채씨가 가지고 온 여말어본고보(麗末御本古譜)를 보고 그 내용을 수록하였다. 안씨동원보와 유사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앞부분에 기록한 농서이씨설의 내용이 유사하지만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상대 계보의 내용도 약간의 글자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이 소장한 고려말 족보가 내타날 때마다 명칭과 내용이 바뀌는 것도 이것이 위보라는 증거이다. 더구나 서두에 기록한 농서이씨설은 안재향(安在享) 편 순흥안씨세보초(順興安氏世譜抄, 1871)나 1907년 노상직(盧相稷)의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 및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와 거의 모든 글자가 같으므로 이들을 단순히 옮겨 적은 것으로 판단되며, 고려말 족보의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



  3. 1931년 죽산안씨 사과공(司果公)파 족보 동국안씨사실(東國安氏事實)
    東國安氏事實
    唐憲宗元和二年丁亥 卽新羅哀莊王七年 中國人隴西李公諱瑗 入本國松嶽山下 有子三人 長曰枝春 仲曰葉春 季曰花春 新羅景文王三年甲申丁倭亂 以兄弟三公 俱有靖國安民之功 賜姓安氏 因更名 長諱邦俊封竹山 仲諱邦傑封廣州 季諱邦俠封竹城
    按舊譜序與此相左而今攷遺譜本註 及順廣安氏譜改證如右 順廣二譜 不錄 隴西公三子 分封事實 此咸興安家藏中出云
    竹山君 安邦俊 見源譜世記

    廣州君 安邦傑 初諱葉春 新羅大將軍 銀靑光祿大夫
    - 子 國信 門下侍郞 - 子 虎 檢校軍器監 尙書院外郞 光祿大夫 - 子 礪仲 門下侍郞 - 子 輔平 吏部尙書 - 子 思憲 僉議中贊 - 子 武成 武一作茂 平章事 銀靑光祿大夫 - 子 慶立 參知議事 光祿大夫, 子 石立 立一作昌 又或一作慶立子 中書令 - 光祿大夫 慶立子 弼夢 太保內使令 - 子 子美 移封順興君, 子 弘美 仍貫廣州

    子美 - 子 永儒 密直副使 , 子 永麟 戶長, 子 永和 戶長

    永儒 - 子 孚 版圖判書 - 子 裕 文成公 號晦軒 配 文廟 - 子 于器 文敬公 - 子 牧 文淑公
    牧 - 子 元崇 仍貫順興,
    牧 - 子 元衡 文惠公 麗朝移封竹城君 是爲新竹山 - 子 瑚 贈左議政
    牧 - 子 元璘 文烈公 移封耽津君 - 子 佑 鰲城君
    竹城君 安邦俠 初諱花春 新羅副將軍 光祿大夫 - 子 國賓 門下侍郞 - 子 侚 一作絢 - 子 德培 中書令 - 子 忠 吏部尙書 - 子 彦謙 門下侍郞
    按安氏受姓之源 見於中國史者 新唐書宰相世系表 安氏姬姓昌意之子 安居西方號安息國 後漢末遣子世高入朝 因居洛陽 晋魏居于安定 後徙遼左 又徙武威 遂爲遼東胡人 見廣州安氏譜
    농서이씨설을 수록하고, 뒤에 순흥 및 광주안씨 족보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고 하면서, 이 설의 출처를 함흥안가장(咸興安家藏)이라 했다. 다음에는 대개 앞에서 나왔던 계보와 기록들을 수록했으나, 마지막에 광주안씨 족보에서 중국안씨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전재하고 있다. 이 내용은 광주안씨 기미보의 안극(安極)공 서문(1741년)에 보인다.
  4. 강효석(姜斅錫) 편(編), 전고대방(典故大方) : 1936년

    전고대방(典故大方) / 안씨가 나오는 페이지 (19b) (역통 한국학중앙연구원)

    安氏
    本姓李氏 始祖安瑗中國人 唐憲宗元和二年丁亥 東入於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倭亂 三兄弟平亂 故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 封竹山君 葉春改名邦傑 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 封廣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증보문헌비고 등과 동일함.]

  5. 김구술(金龜述) 편(編), 조선신금명륜록(朝鮮紳襟明倫錄) : 1937년
    만성시조편(萬姓始祖編), p.127.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DB]
    安氏
    本李氏 始祖 唐宗室 隴西李瑗 憲宗元和二年 丁亥 東入于 本國松岳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亂 三兄弟平亂 故賜姓安氏 枝春改邦俊封竹城君 葉春改名邦傑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封竹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안씨(安氏) 본성은 이씨로 시조 안원은 당종실이요 농서인이다.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정착했다. 세 아들이 있어 장남은 지춘, 차남은 엽춘, 그 다음은 화춘이었다. 신라 경문왕 4년(864년) 갑신란 때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안씨를 사성받았다.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성군에, 엽춘은 방걸로 개명하고 광주군에, 화춘은 방협으로 개명하고 죽주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안씨 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당종실(唐宗室)이란 말이 처음으로 보인다.

  6. 안상대(安相大)씨 소장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

    경북 예천 용궁 거주 순흥 2파 28世 안상대(安相大)氏가 소장한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의 내용은 1파, 2파, 3파 합보이며 上, 下 2권으로 上권에는 이원공(李瑗公)부터 자미공(子美公)까지의 세계도(世系圖)와 사성(賜姓) 기록 및 자미공(子美公)이 광주군후(廣州君后) 장자(長子)로 이어져 있고, 병화로 기록이 소실되어 잘 알 수 없으므로 순흥(順興)을 관향으로 삼는다는 내용과 순흥 1, 2, 3파 11세까지 손록이 기록되어 있다. 下권은 책이 없으나, 상권에 이은 자손록(子孫錄)으로 추측된다.

    안상대(安相大) 소장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
    총 320p 중 표지부터 죽성문중 세계도가 나오는 21p 까지이며, 2001년 9월 10일 동국안문 운영자가 복사한 것을 이미지로 올린 것으로, 다운 받아 압축을 풀면 볼 수 있음.

    [여기는 단기 연대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1945년 8.15 해방 이후, 서기 연대를 쓰게되는 1960년대 이전의 자료로 보임.]

  7. 광주안씨 시직공(侍直公) 파보(1954, 갑오)
    탐진안씨 족보에 나온 종래의 농서이씨설을 인용하면서, 이미 광주안씨 경술보(1790)에 순암공(順菴公) 변무(辯誣)가 있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고 했다.

    廣州安氏族譜別錄
    按康津安氏譜 康津系出順興 而受姓之原昭祥記載 始祖諱椀 李氏中國隴西人也 封隴西君 唐憲宗元和二年 東入于本國松岳山下 有子三人 長枝春 次葉春 花春 新羅景文王四年 甲申有倭亂 兄弟三人 仗義討平 有安國之功 故賜姓安氏 改名邦俊邦傑邦俠 分封竹山廣州竹城云 謹按庚戌譜 順菴公旣有辯誣 恐未可的信此說

    족보 원문 사진 보기

    시직공(侍直公)은 중랑장공 장남(휘 崗)의 차남(휘 叔良)으로, 불언재공파, 완귀공파 등의 선대이다.


  8. 광주안씨 감찰공파보(1957) "안성원류세전록(安姓源流世傳錄)"

    安姓源流世傳錄
    安姓本姓李氏 始祖唐宗室롱西李瑗 唐憲宗元和二年(八O七) 新羅哀莊王八年丁亥 東入於本國松嶽山下 有三子 長枝春 次葉春 次花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倭亂 三兄弟平亂 有安國之功 故賜姓安氏 枝春改名邦俊封竹城君 葉春改名邦傑封廣州君 花春改名邦俠封竹州君 海東安氏之姓始此

    위는 1983년간 광주안씨 대동보에 실린 안상수(安相洙)님의 서문에서 인용한 것인데, 내용은 종래의 농서이씨설과 대동소이하다. 이는 광주안씨 대동보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설은 아니다. 서문에는 누차의 사간공 파보에 시조설로 실렸다고 했으나, 실제는 1957년 간행한 감찰공 파보에 한 차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여러 광주보 중 유일하게 농서이씨설을 시조설로 인정한 기록이다.
    감찰공파인 순암공(안정복)이 이미 1790년 경술보에서 농서이씨설이 허무맹랑한 것이니 후손들이 믿으면 안된다고 했음에도 같은 파의 후손들이 이를 시조설로 파보에 기록한 것은 문제다.

  9. 죽산안씨 대동보 (1976)

    李瑗一諱琬瓊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 (新羅哀莊王) 丁亥 入我東 居松嶽山 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 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賜姓安氏 因更名封君 東方安氏 自此始焉.

    이원(李瑗 : 一諱 琬 또는 瓊)공은 중국(中國)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唐憲宗) 원화 2년(元和 二年,서기 807, 신라 애장왕) 정해(丁亥)에 우리나라에 와서 개성의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정착하셨다. 원(瑗)공 에게 세 아들, 맏이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 화춘(花春)공이 계시니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4년(서기864) 갑신년(甲申年)에 왜란(倭亂,外亂)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 분들이 출정(出征)하여 이를 평난(平亂) 하시었다. 이에 국왕(國王)이 삼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하시고 안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바꾸어(更名) 주시며 아울러 봉군(封君)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安氏가 시작 되었다.

    죽산안씨는 이전까지 계보가 연결되지 않던 준(濬, 少府小監) 또는 그 현손 한평(漢平, 延興府院君)공을 시조로 하는 문중과 영의(令儀, 尙書左僕射)공을 시조로 하는 문중이 따로 족보를 간행해왔다. 1976년에 처음으로 방준(邦俊)공을 통합시조로 두 문중 계보를 연결하여 죽산안씨대동보를 간행하였다. 이는 1923년 죽산안씨세보의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를 정식계보로 편입한 것인데, 1923년 족보에서는 안씨동원보를 범례에 수록하면서 자신들도 믿기어렵다고 했는데, 어떤 고증을 거쳐서 1976년에 정식 계보로 채택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또 1976 죽산대동보에는 1923년 죽산세보의 안씨동원보나 1924 조선씨족통보에는 없는 邦俊二子 國弼(令儀 선대) 계와 방협(邦俠) 후손들 및 광주안씨 기록에도 없는 광주 상대의 관직명과 배위가 나와 있는데 아래와 같다. 근거 기록은 밝히지 않았다.

    [죽산안씨]
    安邦俊 (前諱枝春 唐憲宗四年己丑生 封竹山君 新羅大將軍 銀靑光祿大夫 新羅憲康王乙亥卒ㅇ配金海金氏 父光玉) - 國輔 (版圖判書 配鄭氏) - 倫 (版圖判書 配姜氏 或云 金氏 父夢會), 伯 (出系) - 德生 (版圖判書 配金氏 父光海) - 思 (平章事 配李氏 寧城院 立祠) - 學謙 (初諱千謙 字士文 平章事 配李氏 或云 朴氏), 孟謙 (出系) - 濬 (少府小監 配鄭氏) - 時茂 (時一作必 軍器監 一云左僕射) - 世允 (軍器小監)
    [邦俊 二子] 國弼 (門下侍郞 光祿大夫) - 儉 (中書令 配金氏) - 晩生 (中書令 配李氏) - 慾 (中書令 一云 ?) - 孟謙 (生父思 孟一作文 光祿大夫) - 瀘(大司馬) - 祈(竹山君) - 令儀 (儀一作茂 尙書左僕射)
    [광주/순흥 안씨]
    安邦傑 (前諱葉春 封廣州君 新羅大將軍 銀靑光祿大夫 配金氏) - 國臣 (臣一作信 門下侍郞) - 俿 (按順興草譜 無此一世 而以礪石公爲國臣公之子 或失代而然歟 或礪石公初諱是俿而重書歟 未詳 檢校軍器監 尙書員外郞 光祿大夫 配朴氏) - 礪石 (石一作仲 門下侍郞 配全州李氏) - 輔平 (吏部尙書 或云 內史 靑光祿大夫 配金氏) - 思憲 (僉議中贊 配李氏 侍郞) - 武成 (武一作茂 平章事 銀) - 慶立 (參知議事 光祿大夫), [石立 (中書令 无后)] - 石昌 (一云石生 中書令) - 弼夢 (太保內使令) - 弘美 (門下侍郞 仍貫廣州 廣州安氏 中始祖), 子美 (以功移封順興君 順興安氏 始祖 保勝郞將 推封神護衛上將軍)
    [廣州 弘美 弟] 子美 (以功移封順興君 順興安氏 始祖 保勝郞將 推封神護衛上將軍) - 永儒(密直副使) - 孚(版圖判書) - 裕 (號晦軒 諡文成 配享文廟 文 中贊) - 于器 (號竹屋子 文敬公 文政堂) - 牧 (號謙齋 文淑公) - 元崇 (順興安氏), 元譁 (順興安氏), 元衡 (移封竹城君 新竹山安氏), 元璘 (初諱元崙 封耽津君 ㅇ見李牧隱 賀三子登科詩, 耽津安氏)
    [죽성 안씨]
    安邦俠 (竹城君 新羅 副將軍 銀靑光祿大夫) - 國賓 (門下侍郞) - 侚 (一作絢 未詳) - 德培 (中書令 配朴氏) - 忠 (吏部尙書 配李氏) - 子 彦謙 (門下侍郞 配李氏) : 此派.未知何派之先祖 未詳

  10. 죽산안씨 대동보 (1999)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一諱瑗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八O七) 新羅哀莊王七年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 時有廣州人 殺其主以叛 安瓊(瑗)兄弟 挺身安國 兄弟安國 故賜姓安 以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曰 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國安氏 自此始焉

    죽산안씨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원(李瑗:一諱 瓊)공은 중국(中國)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唐憲宗) 원화 2년(元和 二年,서기 807) 신라 애장왕 8년 정해(新羅哀莊王八年丁亥)에 동생 이황(李璜)공과 같이 우리나라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정착하셨다.
    이때 광주인(廣州人) 이 그 성주(城主)를 죽이는 반란(反亂)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할 때 형제(兄弟:瑗,璜)분이 몸을 던져 이들과 맞서 용감히 싸워 이를 평정(平定)하였다. 이에 국왕(國王)이 두 형제분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하시며 나라를 평안이 하였다고 안국지신(安國之臣) 이라 말씀하시고 형인 원(瑗)공에게 안씨 성(安氏 姓)을 내리시고 동생 황(璜)공 에게는 본성(本姓)을 지키라고 하시며 이씨 성(李氏 姓)을 그대로 하고 고성군(固城君)에 봉(封)하시었다. 원(瑗)공 에게 세 아들, 맏이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 화춘(花春)공이 계시니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4년(서기864) 갑신년(甲申年)에 왜란(倭亂,外亂)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 분들이 출정(出征)하여 이를 평난(平亂) 하시었다.
    이에 국왕(國王)이 나라를 평안히 하였다고 기뻐하시며 삼형제를 가리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칭찬 하시고 이름을 바꾸어(更名) 주시며 아울러 봉군 하시니 맏이 지춘(枝春)공을 방준(邦俊)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封)하시고, 둘째 엽춘(葉春)공을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하시고, 셋째 화춘(花春)공을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封)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安氏가 시작 되었다.



    위의 "안씨동원보"는 1976년 대동보와 조금 다른데, 원출전은 1980년간행 "순흥일파 죽산 탐진 족보"이며, 페이지 52의 전의록 후반에 위와 같은 "竹山安氏同源譜云~~~" 이하가 나온다. 순흥안씨들은 이러한 내용을 자신들의 시조 연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다지 증거 능력도 없는 기록인데, 왜 죽산안씨들이 이를 사실화했는지 의문이다. 안씨 사성 받은 사람이 아들 3형제가 아니고, 이원(李瑗) 본인이라 하고, 고성이씨까지 포함한 것은 이 기록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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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참고 자료

  1. 고성이씨(固城李氏) 족보 - 첨부파일 참고

    죽산안씨는 1999년 대동보에서 고성이씨까지 끌어들여 시조 이황(李璜)이 이원(李瑗)의 동생으로 807년에 형제가 같이 중국서 신라로 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고성이씨 족보상의 계보가
    李璜 -- 田枝 -- 國軒 -- 永年 -- 麟冲 -- 瑨 -- 이존비(李尊庇, 1233-1287)

    와 같으므로, 1233년 생 이존비공의 6대조인 시조 이황은 생년이 1000년 이전이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죽산안씨 측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황(李璜)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1033년과 1063년 기록 2건이 있으며, 고성이씨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시조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高麗史5卷-世家5-德宗-02-08- (1033 년)
    좌우위(左右衛)의 맹교위(猛校尉) 오행(吳幸), 이황(李璜), 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 군대 7명을 생포하여 왔으므로 그들에게 벼슬을 한 등급씩 높여 주었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抄掠丹兵七人賜職一級.


    #高麗史8卷-世家8-文宗2-17-09- (1063 년)
    신축일에 이황(李璜)을 호부상서로, 박희중(朴希仲)을 섭(攝) 공부 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辛丑以[李璜]爲戶部尙書; 朴希仲攝工部尙書.


  2. 철성이씨백세이감(鐵城李氏百世彝鑑) : 1962년 - 첨부파일 참고

    "철성이씨백세이감(鐵城李氏百世彝鑑)" 의 시조 기록란에는 시조에 대한 여러 설을 들고 있는데, 출처를 추원록심원록(追遠錄尋源錄) 이라 하면서 1999년 죽산안씨 대동보의 내용과 유사하게 시조 이황(李璜)이 이기(李琦)의 난을 피해 807년에 형 이경(李瓊=李瑗)과 함께 중국서 신라로 왔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자신들의 시조설로 공식화 한 것은 아니고, 여러 설 중 하나로 소개하였을 뿐이며,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이다. [철성이씨는 고성이씨의 다른 명칭임.]

    여기는 단기 연대를 썼고, 서문에 임인년 간행이라 했으므로 1962년 기록으로 추정됨.


  3. 안씨원류(安氏源流) 고증편 : 죽산안씨 대동보(1999)

    죽산안씨 대동보(1999) 5권 1~17p

  4. 안국승(安國承), 안씨원류(安氏源流) - I : 죽산안씨 대종회보 창간호 (1994)
    안국승(安國承), 안씨원류(安氏源流) - II : 죽산안씨대종회보 제5호 (1997)

    필자 안국승(安國承)님은 2007년 현재 죽산안씨 대종회 회장임.

출처:http://blog.daum.net/empirekings/8470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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