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의 유래와 역사.
1) 광주안씨(光州安氏)의 주장.
가. 을유보에는 방걸-국신(문하시중)- 여중(문하시랑)-보평(내사시랑)-헌사(첨의중찬)-무성(평장사)-경립(참지의사)-석창(중서령)-필몽(내시령)-홍미(문하시중):자미(호군공)이라 돼 있다는 구전, 현존 기록이 없음.
나. 족보인 1739년 [경인보] 광주안씨 신보 밀양판 별록에 이르기를,
충주 위류면 소재 순흥안씨 외손 김씨 집에 보관중이던 구보에 순흥안씨 시조공 子美가 광주안씨 시조공 방걸의 후손이라 기록돼 있음을 이를 충주 김씨 처대가 목격한 후 다시 광주안씨 종친과 정확한 사실확인을 위해 그곳을 찾아갔으나 집이 불에 타고 사라졌다고 기록. 광주안씨 측에서도 신빙성이 없어 “별록”에 기록.
2) 죽산안씨(竹山安氏)의 주장(구 죽산)
가. 1744년 [동원보]에 이르기를, 중국 당나라 농서(隴西)에서 당 헌종 원화 2년 정해丁亥년, 신라 40대 애장왕 7년에 이경, 이황형제가 개성 송악산에 이주 정착. 경기 광주廣州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주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 형제가 진압. 이때 이경(이원)은 안씨安氏 성을 하사받고 이황은 고성에 정착하여 고성이씨李氏가 됐으며, 이경의 큰 아들 지춘, 엽춘, 화춘은 각각 864년 신라 경문왕 3년 갑신년 외란을 평정하여 임금이 이름을 방준, 방걸, 방협으로 각각 하사, 이들은 각각 죽산군, 광주군, 죽성군이 되었다라고 기록.
3) 순흥안씨(順興安氏)의 반론 및 객관적 정리
가. 순흥안씨의 첫 족보는 1546년 고려 명종 원년 병오년 경상감사 안현(문간공), 파주목사 안위(문희공) 형제가 처음 발간.(최초 족보인 문화유씨(1423년 세종5년)와 안동권씨(1476년 성종7년)임- 최초 족보는 중국 북송시대 12세기경 소순이 처음 만듬). 이는 광주안씨 족보보다 193년이 앞서고 두 번째 족보 1659년 기해보는 이들 광주안씨 족보보다 80년이나 앞선다. 광주안씨의 주장이 맞다면 약 200년전에 만들어진 순흥안씨가 전 종친들을 대상으로 족보 제작을 할 당시 외족이 보관하고 있다던 구보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나. 순흥안씨 시조공 子美의 출생과 이전 조상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이 아쉽다는 첫 족보 제작자의 주장처럼 그 기록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이 현재의 실정.
다. 광주안씨 족보 별록처럼 광주안씨조차 그 기록의 신빙성을 믿지 않아 “별록”에 기록하고 있는 점을 보아 그 기록의 객관성을 믿기 어렵다.
라. 한국족보편찬위원회는 “순흥은 중국에서온 이씨와 무관하다”고 [한국인의 족보]에서 기록.
4)순흥안씨(順興安氏)에 대한 공식정리
가. 최근 기록에 따르면 안씨는 전체 대한민국인구 가운데 637,786명으로 이 가운데 순흥안씨 487,526명(76.4%), 죽산안씨 56,051명(8.8%), 광주안씨 43,609명(6.8%)로 순흥안씨가 월등히 후손이 많음. 특히 순흥안씨는 단종 복위사건, 각종 사화에 휘말려 관향인 경북 순흥 일대 일족이 모두 화를 입는 등에도 번성하였고 우리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광주안씨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없음에도 후손이 번성하지 못함.
나. 안씨는 109개 본관이 존재하나 이가운데 103개는 기록이 없음.
다. 순흥안씨는 나라에서 사성한 기록이 없다.
라. 자미공은 고려 신종 때 흥위위 보승별장이었으며 사후 신호위 상호군에 추봉. 1170년대 출생가능성.
마. 순흥안씨는 유가儒家의 종가임. 조선시대 성균관의 제사일을 돕기 위해 안향 선생의 노비 후손들이 1000명에 이르러 관동(현 명륜동)의 또다른 지명이 “안씨 노비촌”이어 그 위세와 명예가 컸음. *설렁탕은 원래 선농이라는 농사의 신에게 바치는 소고기 음식이었으나 이를 처음 일반에 판 것도 관동노비들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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